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.19 혁명/진행 (문단 편집) == 4.19 혁명 == {{{#!folding ※ 4.19 혁명 당시의 상황 요약 : 보기 / 접기 || 날짜 || 시위 장소 || 시위 규모 || 비고 || || 4월 19일 || 서울, 부산, 인천, 대전, 광주, 대구, 전주, 청주 || 10~20만여 명[* 서울에서만 10만여 명, 광주 5000여 명, 전주 3000여 명, 청주 300여 명 등] || 서울, 부산, 광주에서 경찰이 발포 || || 4월 20일 || 대구, 전주, 이리, 인천 || 5000~6000여 명 || 이승만 대통령 담화 발표, 자유당 견해 피력 || || 4월 21일 || 인천 || 미상 || 장면 부통령 10개안 발표, 국무위원 전원 사표 제출 || || 4월 22일 || 인천, 군산, 익산, 포항 || 미상 || || || 4월 23일 || 인천, 군산 || 3000여 명 || 이기붕 '사퇴를 고려' 발언 || || 4월 24일 || 전주, 마산, 인천 || 4500여 명 || 마산에서 노인 데모 발생, 이기붕 모든 공직 사퇴 || || 4월 25일 || 서울, 마산, 춘천, 영주, 김해, 진주 || 8~10만여 명[* 서울에서 4~5만여 명, 마산에서 3만여 명, 춘천 2천여 명, 영주 수백여 명, 김해 200여 명] || 서울에서 대학교수단 시위 발생, 마산에서 할머니 데모 발생 || || 4월 26일 || 전국 각지의 대도시 및 중소도시 || 수십만여 명 || 이승만 하야 성명 발표 || }}} 4월 19일 화요일, '''[[피의 화요일]]'''이라고 불리는 그날의 시위는 서울, 대구, 부산, 마산, 전주, 청주, 대전,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. 특히 그동안 미적거리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. 이 중 부산과 광주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. ''''피의 화요일''''이라고 불리는 4월 19일 시위 동안 100여명이 넘는 사망자[* 서울에서 104명, 부산에서 13명, 광주에서 6명 등]가 발생했다. 정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혁명적 시위에 당황하여 이 날 오후 4시 30분에 [[계엄령]]을 선포했다.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사태의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'난동', '폭력사건' 운운하며 허둥댔다. 사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이기붕도 사퇴를 고려한다는 애매한 말로 더욱 공분을 샀다. 이런 한심한 작태에 '''군대도, 미국도 마침내 등을 돌렸다.''' 그런 상황에도 시위는 연일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다. 더 자세한 시위 내용과 전개 과정은 아래의 문단을 참고하라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